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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금광 사도 광산 야스쿠니 신사 주변국 갈등

by 상상브로스 2024.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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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금광(일본어: 佐渡金山 사도 킨단)은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의 사도가 섬에 위치한 금광이다. 광석은 주로 '은 흑'(銀黑)이라고 불리는 석영 중에 액상에 존재하던 휘 은광 및 자연 자연금의 미립자였다. 1601년에 금맥이 발견된 이래 에도 시대 기간 중요한 재원으로써 개발되었다. 에도 시대 초기의 전성기에는 금이 1년 동안 약 400kg, 은이 약 40톤 이상 채굴된 일본 최대의 금 광산으로, 은 생산에서도 일본 유수의 광산이어서 은 화폐의 제작을 위한 재료를 공급하는 중요한 광산 구실을 했었다. 

금광 입구

 

그중 아이카와 광산은 에도 막부가 직할 경영하여, 대량의 금은을 산출한 사도 금광의 중심이었다. 산출하여 제련한 철심과 회 취언은 바쿠후에 상납 되어, 이를 긴자에 맡겨 화폐를 주조하였다. 또한 은은 특히 생실 등의 수입 대가로써 청나라 등에 대량 수출되어, 사도 산출의 회 취언은 세다 은으로도 불렸다. 현재는 광산이 고갈되고, 금의 가치와 노동자 임금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여 수지가 맞지 않아 채굴이 중지되어, 금광은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다. 갱도의 총연장은 약 400km에 이르지만, 그중 관광 노선으로 개발된 구간은 300m 정도이다. 이 밖에, 매년 7월 25일 ~ 7월 27일 사이에 금광 축제가 열린다.

사도 금광의 심볼 '도유노 와레토'( 道遊の割戸 )

연혁

  • 1601년 - 씌우고 긴자의 산사(山師) 3인에 의해 발견되었다.
  • 1603년 - 사도 부교 오쿠보 나가 야스가 관할을 맡았다.
  • 1868년 - 공부 성의 소유가 되었다.
  • 1889년 - 궁내 성 어로국의 소유가 되었다.
  • 1896년 - 미쓰비시 합자회사가 인수하였다.
  • 1918년 - 미쓰비시 광업 주식회사(지금의 미쓰비시 마태 리얼)의 관리권을 넘겨받았다.
  • 1967년 - 사도 금광중 아이카와 광산 관계 유적이 '사도 광산 유적'으로써 일본이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 1989년 3월 31일 - 광산이 고갈됨에 따라 채굴이 중단되었다. 미쓰비시 마태 리얼의 자회사인 주식회사 골든 사도가 경영권을 넘겨받았다.
  • 2007년 - 일본의 지질 100선에 선정되었다.

논란:일제강점기 때 사도 광산에 한국인들 강제노역하였다


2022년 2월 1일에 일본 정부는 유네스코 문화유산 사무국에 사도 광산을 세계유산으로 올려달라고 추천서를 보냈으나 온전한 역사를 보여주지 않고 시기를 에도 막부 시대로만 한정해 놓은 관계로 보류 중이다. 일본이 2015년 7월에 군함도를 세계유산으로 등재시켰을 때 국제 사회에 시설도 설립될 것이라 약속했지만 2021년 7월에 유네스코에서 현장 조사를 한 결과 피해자들을 기억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확인된 사례도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사도 광산을 세계유산으로 지정하는데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사도 광산 강제 동원 조선인 747명 명단 확인…이제 절반 찾았다.


‘747명 그리고 772명’. 이름이라도 ‘찾은 자’와 이름조차 모른 채 ‘남겨진 자’의 숫자다. 모두 1519명의 ‘사람’들은 1939년 2월부터 1945년 7월까지 충남, 충북, 전남, 전북, 강원, 경기 등의 고향을 떠나 ‘강제’로 배를 타야만 했다. 목적지는 이름조차 낯선 일본 니가타현의 작은 섬. 일본에서는 헤이안 시대 말부터 사금 산지로 명성을 떨쳤던 곳. 당시도 지금도 사람들인 이곳을 ‘사도’라고 불렀다.


섬에 도착한 사람들이 향한 곳은 광산이었다. 전범 기업 미쓰비시광업(주)의 작업장이 그곳에 있었다. 낯선 곳으로 끌려온 이들은 익숙지도 않은 광부 일을 해야 했다. 갱을 파고 금 등의 광석을 채굴하는 일이었다. 많은 이들이 죽었다. 진폐증이 대표적 사유다. 채굴 과정에서 ‘폭파’라는 일본말을 알아듣지 못해 사망하는 때도 비일비재했다. 운이 좋아 섬에서 탈출했거나 해방 이후 살아 돌아와도 탄광 생활의 흔적은 악착같이 따라붙었다. 후유증으로 가족들 앞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광산 강제 동원은 끝끝내 이들의 삶을 파괴했다. 사도는 결코 아름답거나 추억할 만한 공간이 될 수 없는 곳이었다.

야스쿠니 신사

야스쿠니 신사(일본어: 靖國神社/靖国神社 야스쿠니신사) 또는 조세요 신사(일본어: 長州神社 초세요 진자[*])는 일본 도쿄도 지요다구 황궁 북쪽에 있는 신사로, 전쟁에서 싸우다 전사한 사람들을 신(영령)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총면적 93 일본에 있는 신사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영미권의 언론에서는 ‘전쟁 신사(war shrine)’란 용어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배전

 

1869년(메이지 2년), 침략 앞잡이의 넋을 달래기 위해 설립한 도쿄쇼콘자(일본어: 東京招魂社 토쿄쇼콘자[*])가 그 전신이다. 지금의 이름인 ‘야스쿠니(靖國/靖国)’는 ‘나라를 안정케 한다’는 뜻으로, `좌씨춘추(左氏春秋)'의 `오이정국야(吾以靖國也)'에서 따왔다. 1879년 메이지 천황에 의해 현재 이름으로 개명됐다. 야스쿠니 신사는 벚꽃의 명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신사에는 2,466,532명의 남성, 여성,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이름, 본관, 생일, 죽은 장소들을 적어 봉안하고 있고, 심지어는 다양한 애완동물들까지도 함께 모셔져 있다. 이들 중 1,048명은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유죄 판별 받았으며, 특히 이들 중 14명이 A급 전범이기에 일본의 옛 식민지 국가들과 갈등을 겪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신사 본전에는 일본을 위해 싸우거나 일하다가 전사, 사망한 사람들을 합사하여 봉안해 놓았는데, 이들 중 강제적으로 일본에 끌려갔던 한국인, 대만인들도 합사되어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지요다구


다양한 신토 행사들인 이곳에서 열리는데, 특히 일본의 고대 신들을 위한 축제가 열리는 봄과 가을에 가장 활발하다. 야스쿠니 신사의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는 신사 배전 위에 걸려져 있는 국화 무늬의 거대한 흰 커튼인데, 이는 일본 황실의 고유 문양이다. 최근에는 고위 일본 정치인이나 외교관들이 이곳에 참배하며 국제적으로 물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현재의 최고 제관은 2018년 11월에 구니 오 고비로의 뒤를 이은 13대 제관으로, 그 이름은 길게 치기 북미 야마구치이다.

역사

1869년 신사 건립

야스쿠니 신사의 본이름은 '도쿄 쇼코자(東京招魂社)'로, 메이지 천황에 의해 1869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의 기원은 에도 막부 말기에 개국에 반대하는 100여 명의 사무라이를 탄압한 안 세기 대옥(安政の大獄)에서 희생된 이들을 기리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본래 목적은 조슈번에서 나고 자란 이토 히로부미 등이 바쿠후와의 싸움에서 숨진 자들을 추모하려는 목적이었다. 

야스쿠니 신사 임시대제에 참배하는  쇼와 천황

 

당시 일본은 허물어져 가는 에도 막부 세력과 조슈번 등을 중심으로 하는 반막부터 세력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이들 간의 갈등이 점점 더해갔고, 결국에는 이 두 세력 간에 보신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이 전쟁에서 천황은 반막부터 세력을 지지하였고, 이후 반막부터 세력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권력을 잡자 '쇼코자', 즉 위령제를 세워 전쟁에서 천황을 위해 싸우다 죽은 자들을 추모하라고 명한다. 

 

이 명은 즉, 조슈번에서 행해지던 신토 (일본의 종교) 행사를 중앙수도인 도쿄로 옮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 가장 먼저 봉안된 사람은 이토 히로부미의 스승이며 아베 신조 총리가 가장 존경한다고 밝힌 바 있는 요시다 쇼인이었다. 참고로 요시다 쇼인은 '한반도를 정벌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정한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었기에, 이 또한 한국과 마찰의 요인이 되고 있다.

 

이후 1877년에 세냐는 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새롭게 6 새로 합사되었다. 이후 1879년, 도쿄 시사 콘서트 자는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직접 '야스쿠니 신사'라는 새로운 이름을 하사받았다.

청일 전쟁과 중일 전쟁

1887년, 신사를 관리 책임이 육해운성으로 완전히 이전되었고, 일본 제국이 점차 확장함에 따라, 야스쿠니 신사에는 강제적, 혹은 자발적으로 일본을 도운 아이누 Archived 2022년 2월 18일 - 왜 이백 기계인들, 오키나와인들, 한국인들이 차차 봉안되기 위해 시작했다. 원래 메이지 천황은 대만인들이 이곳에 합사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는 시모노세키 조약 이후 일본이 대만을 병합한 이후에도 여전히 조직적인 반란군들이 일어나 일본에 대항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제국이 패망하기 위해 시작하며 대만인들을 징집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자 어쩔 수 없이 대만인들도 신사에 함께 모시는 것을 승인하게 되었다. 1932년, 조치 대학의 학생 2명이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반한다는 이유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후 1936년, 로마 교황청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것을 일종의 '애국적인 동기'로 인한 것으로 보고 이를 허가해 주었다. 이 조치는 일본과 그 식민지 내에서 종교적 문제로 인한 갈등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으나, 종교적 세력들이 군부 세력과 천황가에 복종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2차 세계대전과 연합군 점령 아래의 일본

1930년대 동안, 군부는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을 위령하는 것을 국가적으로 중대한 행사로 만들었고, 이는 야스쿠니 신사를 더더욱 중요한 곳으로 급부상시켰다. 본디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는 사람들의 이름은 관영 언론에 보도되어, 일반인들에게 누가 새롭게 합사되는지를 알 수 있게 하였으나, 1944년 4월 이후에는 이러한 정책이 폐기되어 결국에는 누가 신사에 모셔지는지조차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야스쿠니 신사는 세계 대전 기간 내내 국민들의 '천황가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대표하는 일종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졌고,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다는 것은 그 죽음의 고귀함과 순결함을 보장받는다는 뜻이었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아갈 즈음, 가미카제 특공대, 즉 자살 특공대원들 사이에서는 '야스쿠니에서 다시 보자'라는 인사말이 마지막 인사로 유행할 정도였다. 결국 1945년 일본이 망하고 연합국 군대가 들어와 GHQ를 설치해 통치를 시작하자, 야스쿠니의 세력도 급격히 위축되기 위해 시작하였다. 

 

1946년에는 종교와 세속 권력이 분립되었고, 야스쿠니 신사는 국가의 지배하에서 벗어나 민간 법인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원래 GHQ는 이 신사를 불태워버리고 그 자리에 강아지 경주를 열리게 하는, 일종의 극약처방을 내릴 계획이었으나, 로마 교황청 소속의 브루노 비 터 신부와 패트릭 바란 신부의 만류로 야스쿠니 신사는 결국 살아남게 된다.

전쟁 이후, 그리고 주변국과의 갈등

1956년,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후생노동성과 신사에 합사된 전범들에 대한 신상정보를 공유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이에 따라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신사에 안치되지 못했던 일본군 전사자들이 1959년 4월까지 모두 함께 합사되었다. 다만 극동국제군사재판에 기소된 주요 전범들은 전쟁이 끝난 직후 모두 신사에서 퇴출당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정부는 일종의 '예우' 차원에서 그들을 곧 다시 신사에 돌려놓을 방안을 궁리하기 위해 시작했다. 이후 1951년에 있었던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일본이 국제 무대로 되돌아오는 데 성공하자, 일본 정부는 지방의 군소 신사들에 다시 일부 전범들을 다시 모시는 것을 허락하였다.


1958년, 마지막 전범이 가출옥 허가를 받아 감옥에서 빠져나오기 전까지 야스쿠니 신사에는 단 한 명의 전범도 없었으나, 전범들이 다 풀려나자 1959년부터 B급과 C급 전범들, 즉 침략전쟁을 직접적으로 기획, 시작, 수행하지 않은 자들을 점차 다시 신사 내에 들여놓기 위해 시작하였다. 14명의 A급 전범들, 특히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 도조 히데키 수상을 포함한 일본군의 핵심 수뇌부들에 대한 명단이 1966년에 신사에 전달되었고, 신사는 1970년대까지 이들을 신사 내에 들여놓을 것인지에 대한 결정을 미루었다.

 

이와 같은 조치는 당시의 최고 제관이었던 후지 마로 쓰쿠바가 1978년에 죽을 때까지 이 결정을 유보했기 때문이었는데, 그의 뒤를 이어 최고 제관에 오른 나가요시 마쓰다라는 비밀리에 A급 전범들을 1978년에 몰래 합사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히로히토 천황은 이에 유감을 표시했고, 이후 신사 참배를 거부하였다.


A급 전범의 합사 사실은 1979년에 대중들에게 알려졌으나, 이에 대한 논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975년 이후 천황 부부는 단 한 번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적이 없다. 이후 헌덴지의 주지승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A, B, C급 전범들 1,618명들을 위해 미사를 열어달라고 말했고, 교황은 이에 답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1980년에 미사를 열어 그들을 추모하는 일이 있었다. 게다가 야스쿠니 신사의 웹사이트와 박물관은 미국이 일본 제국이 진주만을 공격할 수밖에 없도록 '압박했다'라는 주장, 그리고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위해 온 아시아를 침략했다는 주장을 펼치며, 세계 대전의 책임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에 주변국 간의 갈등이 더더욱 심해지고 있는 형편이다.


앞서 말했듯이, 야스쿠니 신사에는 보신 전쟁, 세냐는 전쟁, 러일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의 병사 이외에 전범으로 사형을 당한 도조 히데키 수상 등의 A급 전범들이 안치되어 있어서 대한민국이나 중국 등의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피해를 보았던 아시아 국가들의 국민들은 야스쿠니 신사와 그곳에 참배하는 정치인 등을 비판하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대신이 2001년 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할 의향을 표시한 것에 대하여 A급 전범이 안치되어 있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인정할 수 없다며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강력히 반발하였다. 결국 고이즈미 총리는 15일을 피하여 8월 13일에 참배하면서 이와 같은 조치가 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양국에 일종의 배려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도 2002년 4월 21일과 2003년 1월 14일, 2004년 1월 1일, 2005년 10월 17일, 2006년 8월 15일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아베 정권 탄생까지 중-일 간의 수뇌 교류는 정체되었었다. 국가와 그 기관은 종교 관련 교육이나 활동을 할 수 없다는 일본 헌법 20조, 공공비용은 종교기관이나 단체에 사용될 수 없다는 일본 헌법 89조 조항에 위배된다며 일본 내에서 여러 차례 소송이 제기되기도 했다.


니혼게이자이 신문이 실시한 총리대신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일본 여론 조사에서 전체 응답자 가운데 46%는 찬성했고 38%는 반대했다. 다만 일본의 우익 단체, 신토 신봉자, 몇 전범 전몰자 가족 등은 이에 찬성하고 있다.

 

연례행사

  • 1월 1일 :
    0시 - 와카 미주 호텔은(若水奉奠)
    8시 - 리넨 사이(新年祭)
  • 1월 2일 : 후쓰카사이(二日祭)
  • 1월 7일 : 쇼와 덴노 무사시노 노 미사 사기(昭和天皇 武蔵野陵 遙拝式) - 쇼와 덴노의 무덤을 참배하는 행사
  • 1월 30일 : 고메이 덴노 놓지 노 쓰기 노와 노 히사시 노 미사사기 요하이 시키(孝明天皇 後月輪東山陵 遙拝式) - 고메이 덴노의 무덤을 참배하는 행사
  • 2월 11일 : 캔 코고 너흰 사이(建國記念祭) - 진무 덴노가 일본을 건국한 것을 기념하는 행사
  • 2월 17일 : 너흰 사이(祈年祭) - 풍년을 염원하는 봄 축제
  • 4월 21일~23일 : 선키 레이 타이 사이(春季例大祭) - 연례 봄 축제
  • 4월 21일 : 키 필요로 하라니까(清祓) - 정화 의식
  • 4월 22일 : 토지 수상이(当日祭)
  • 4월 19일 : 대 풀 수가 사이(第二日祭)
  • 4월 29일 : 쇼와 사이(昭和祭) - 쇼와 덴노 탄생일
  • 6월 29일 :
    10시 - 고 노리었어 기넨비사이(御創立記念日祭) - 야스쿠니 신사 창건 기념일
    14시 - 케네이 히코시키(献詠披講式)
  • 6월 30일 : 오히라에 시키(大祓式) - 대전과 의식
  • 7월 13일~16일 : 미나마 마쓰리(みたままつり) - 조상들의 넋을 기리는 축제, 이때 사원의 길들이 40피트가 넘는 높은 벽들로 둘러쳐지며, 30 켜지며,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별한 가족들을 추모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 7월 13일 : 전 야 사이(前夜祭)
  • 7월 14일 : 다이치야 사이(第一夜祭)
  • 7월 15일 : 대 네 야 사이(第二夜祭)
  • 7월 16일 : 대 산야 사이(第三夜祭)
  • 7월 30일 : 메이지 덴노 후시 미 모모야마 노 미사 사기 필요로 하기 시키(明治天皇 伏見桃山陵 遙拝式) - 메이지 덴노의 무덤을 참배하는 행사
  • 10월 17일 : 진구 칸나 메시아 필요로 하기 시키(神宮神嘗祭遙拝式) - 이세 대신 궁을 기리는 행사
  • 10월 17일~20일 : 스키 레이 타이 사이(秋季例大祭) - 연례적 가을 축제
  • 10월 17일 : 기여하라니까(清祓) - 정화 의식
  • 10월 18일 : 토 지어서 사이(当日祭)
  • 10월 19일 : 대 퍼서 카사이(第二日祭)
  • 10월 20일 : 대 미카사의(第三日祭)
  • 11월 3일 : 메이지 사이(明治祭) - 메이지 덴노 탄생일
  • 11월 23일 : 너희 메시아(新嘗祭) - 첫 수확물을 거둔 것을 기념하는 행사
  • 12월 23일 : 덴노 고 탄신 호수 카사이(天皇御誕辰奉祝祭) - 현재 덴노의 탄생일
  • 12월 25일 : 다이쇼 덴노 타마! 노 미사 사기 필요로 하기 시키(大正天皇 多摩陵 遙拝式) - 다이쇼 덴노의 무덤을 참배하는 행사
  • 12월 31일 : 오히라에 시키(大祓式) - 대전과 의식

제신 목록

야스쿠니 신사에는 2,466,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 합사되어 있다. 이 목록에는 단순히 전장에서 싸웠던 군인들뿐만 아니라 후방에서 전쟁 수행을 도왔던 여성, 어린아이,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신사에는 시체, 혹은 유해, 심지어 위패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사람들의 명단만이 존재한다. 신사의 제신에는 일본인들만이 모셔져 있는 것이 아니라, 27, 21 함께 기록되어 있다.

목록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될 수 있는 사람들은, 보통 전쟁 수행 도중 일본을 위해 싸우다 숨진 자들에만 한정된다. 이 때문에 전쟁 탓에 죽은 일반인들인 이곳에 들어갈 수 없다. 이곳에 합사된 사람들은 모두 다음의 목록 둘 중 하나에 포함된다.

  • 일본군에서 복무했던 군인들, 혹은 시민들
  • 전장에서 전사하였거나, 일본 열도 바깥에서 임무를 수행하다가 입은 부상이나 질병 탓에 사망한 사람들
  • 임무 수행 도중 입은 부상이나 질병으로 인해 실종되었거나, 죽었다고 추측되는 사람들
  •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서 비준된, 군사재판 탓에 사형당한 사람들
  • 군대 통솔하에서 전투에 참여했고, 이로 인한 부상 혹은 질병 탓에 사망한 시민들(오키나와의 시민들 포함)
  • 소련의 강제 수용소에서 전쟁 도중, 그리고 종전 이후에 사망한 사람들
  • 자발적으로 전쟁 수행을 돕다가(공장 인부, 학도병, 적십자 단원, 공습 경보 원 등) 임무 수행 도중 사망한 사람들
  • 전투 상선에서 전쟁 탓에 사망한 선원들
  • 민간 선박의 침몰 탓에 사망한 선원들
  • 전투 도중 사망한 오키나와의 어린아이들
  • 사할린, 관동, 조선, 타이완의 식민 통치 기구에서 일하다 죽은 고위 관료들

매년 2차 세계 대전에서 죽은 군인들이 새롭게 발견됨에 따라 이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곤 하지만,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서명한 이후에 사망한 일본인들은 단 한 명도 이 신사에 합사된 경우가 없다. 이 때문에, 야스쿠니 신사에는 일본 자위대 소속 군인이 단 한 명도 모셔져 있지 않다.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지는 사람들의 합사 여부는 신사 측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하며, 친가족들의 동의 여부는 고려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특히 합사된 한국인들의 친가족 반대에도 불구하고, 야스쿠니 신사는 절대로 한 번 합사된 사람들을 명단에서 빼지 않는다. 야스쿠니 신사의 고위 제관의 발언에 의하면, 이미 한 번 합사된 사람의 영혼은 다른 사람들의 영혼들과 하나로 합쳐지기 때문에, 절대 다시 뗄 수 없다고 한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에도 막부에 속했던 사람들의 명단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세냐는 전쟁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사람들도 존재하지 않는데, 이는 이들이 천황가의 공적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함께 합사된 A급 전범

야스쿠니 신사에는 1,000여 명의 B, C급 전범들과, 14명에 달하는 A급 전범들이 함께 합사되어 있다. 이들은 침략전쟁을 기획, 시작, 수행한 자들로, 14명들 중 8명이 교수형을 당해 세상을 떠났으며, 6명은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나중에 풀려났다. 이들이 신사에 합사된 사실은 일본과 타 주변국들과의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아래에 있는 목록은 A급 전범들의 목록이다.

함께 합사된 A급 전병

  • 도조 히데키 : 일본 제국의 40대 총리이고, 진주만을 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발발케 한 주요 인물이다.
  • 기무라 헤이트로 : '미얀마의 도살자'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대량학사를 주도한 사람들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 미얀마 지역(미얀마)에서 엄청난 수의 민간인, 군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는 것을 허락해 준 장본인이다.
  • 도고 시게모리 : 전쟁 당시 일본의 외무대신이었다. 전쟁 외교를 수행하였다.
  • 마츠오카 오시게 : 역시 일본의 외무대신으로, 일본의 국제 연맹 탈퇴를 주도하였으며, 이탈리아 왕국, 나치 독일 간의 삼국 동맹이 이어지도록 힘쓴 인물이다. 도쿄 전범 재판 도중 병사하여,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못하였다.
  • 무도 아키라 : 중국의 일본군 참모장, 필리핀 방면 참모장 등의 직위를 겸임하였다. 침략전쟁을 주도한 죄로 처벌받았다.
  • 우 메지 오시기로 : 일본 관동군 사령관이자, 육군참모총장이었다. 1945년에 일본의 항복 문서에 조인한 인물 중 한명이다.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이후 수감생활 도중 사망하였다.
  • 히라누마 기이치로 : 일본의 추밀원 의장, 내무대신 등의 자리를 거쳤다. 전쟁 도중 신토를 적극적으로 장려하여 일본 국민들의 우민화를 이끌었으며, 이후 책임을 지고 수감 생활을 하였다.
  • 고이소 구니아키 : 도조 히데키의 뒤를 이은 41대 총리이다. 조선 총독이기도 하였으며, 학도병 제를 실시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극동 국제재판에서 종신 금고형을 선고받았고, 이후 1950년에 사망하였다.
  • 나가노 오사마 : 일본의 38대 해군 대신이었다. 진주만 공습을 승인한 사람이었는데, 재판 이후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 도이하라 겐지 : 관동군의 사령관이었는데, 전쟁 중 사로잡힌 군 포로들을 비인간적으로, 야만적으로 대우한 죄를 감안하여 형을 선고받았다.
  • 마쓰이 이와 네 : 1937년, 상하이에 파견된 일본군의 사령관이었는데, 유명한 난징대학살을 주도한 장본인이다.
  • 시라토리 도시오 : 일본의 주이탈리아 대사로서, 국제 연명 탈퇴 공작을 펼쳤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종신 금고형을 받았고, 이후 복역 도중 후두암으로 사망하였다.
  • 이타가 키 세이지로 : 만주사변을 기획한 당사자였고, 일본이 중국에 침략하는 것을 이끌었다.
  • 히로타 고키 : 일본의 32대 총리였으며, 극동 국제재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처형당한 전범 중 유일하게 문관 출신이었다.

경내

야스쿠니 신사 부지는 6.25 헥타르에 달하며, 그 안에는 상당한 수의 건물들이 소재한다. 일본의 다른 신사들도 꽤 큰 크기를 자랑하지만 야스쿠니 신사는 전쟁에서 싸우다 죽은 사람들을 모신 곳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그 크기가 제일 큰 편에 속한다. 특히 신사 경내에 있는 유슈칸(遊就館)박물관은 야스쿠니 신사에만 있는 독특한 구조물로, 여타 신사들에서는 확실히 찾아보기 어려운 건물이다.

신사

야스쿠니 신사의 하이덴(배전,拝殿)은 사람들이 신사를 참배하며 기도하러 오는 기도실이다. 본디 1901년에 처음으로 지어졌으며, 지붕을 구리로 만든 기와로 덮어 영령들에게 추모의 뜻을 표했다. 구리 지붕은 1989년에 새롭게 덮었다. 기둥 사이에 걸려있는 치렁치렁한 백색 커튼은 주요 행사가 있을 때면 보랏빛 커튼으로 바꾼다. 신사의 혼 데(본전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진 영들이 거한다고 믿어지는 곳이다. 1872년 처음 지어졌으며, 1989년에 공사를 거쳐 현재의 모습으로 탈바꿈하였다. 이곳에서 주요 신토 의식들이 행해지며, 보통의 경우 관람객들의 출입을 금지한다.

야스쿠니 신사의 혼덴


하이덴 우편에는 산 슈엔(참 집전,参集殿)이 있다. 회의실로 주로 쓰이며 2004년에 재공사를 거쳐 지어졌다. 이곳에서는 본전으로 기도하러 온 개인이나 단체들이 회의실에서 대기하거나 기다리는 동안 회의를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산 슈엔 바로 뒤에 있는 건물은 토차쿠덴(도착 전,到着殿)으로, 손님들을 맞이하는 공간이다. 본전 바로 뒤에 있는 건물은 레이 지고 호안 덴(霊璽簿奉安殿)가 길이 주마 주루키 양식으로 지어져 있는데, 이곳에는 안치된 영령들의 이름을 빼곡히 적은 종이 목록이 들어있으며, 특별히 히로히토 천황의 기부금을 통하여 1972년에 내진 콘크리트로 지어졌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그에 딸린 보조 신사가 2개 있다. 하나는 모토 미량(원군,元宮)으로, 메이지 유신 기간 일어난 내전 시기 동안 천황의 편에서 싸우다가 죽은 이들을 기리기 위하여 친 천황파들이 교토에 세웠던 신사가 그 기원이다. 1931년에 이 신사를 교토에서 통째로 들어 옮겨 야스쿠니 신사 남쪽으로 옮겼다. 모토 마야의 뜻인 원군, 즉 '원래 궁전'이라는 뜻은 이 신사가 원래 야스쿠니 신사가 하던 역할을 하던 신사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 보조 신사는 '친 레이 샷'로, 1965년 모토 마야의 정남 쪽에 세워졌으며 전쟁에서 죽었으나 야스쿠니 신사의 본전에는 들어가지 못한 이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다. 이 신사는 국적을 가리지 않기에 단순히 일본인들만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죽은 모든 이들을 기리는 신사이다.

도리이와 몬

야스쿠니 경내의 보도와 곳곳에는 도리 이들과 문(門)들이 세워져 있다. 동쪽에서 야스쿠니 신사 안으로 들어갈 때,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는 도리이는 다이치 도리이(대대 도리이)이다. 거대한 강철로 지어졌으며, 1921년에 신사의 정문으로 세워졌을 때는 당시 일본에서 가장 거대한 도리이였다. 대략 높이는 25m이며 너비는 34m이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도리이는 1943년에 날씨 때문에 손상을 입은 도리이를 1974년에 교체한 것이다.

다이치 도리이


다이니 도리이는 야스쿠니 신사의 2번째 도리이이다. 1887년에 이곳에 서 있던 목재 도리이를 대체하여 지어졌으며 현재 일본 열도에서 가장 거대한 청동 도리이이다. 다이니 도리이를 통과하면 바로 뒤에 신문(神門)이 서 있는데, 6m 높이의 편백 문이다. 1934년 처음으로 지어졌으며 1994년에 재공사를 거쳤다. 신문의 두 문짝에는 직경 1.5m나 되는 황실의 문양이 거대하게 새겨져 있다. 이 문서 쪽에는 추면 도리이(中門鳥居)가 있는데, 본전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 문을 거쳐야만 한다. 2006년에 편백을 사용하여 복원했다.

추몬 도리이

기념물

  • 이레가 노 이주미 - 현대적인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갈증으로 전쟁에서 사망한 이들을 기리기 위해 바쳐진 온천이다.

이레이 노 이주미

  • 전쟁 과부와 아이들 동상 -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채 자식들을 길러낸 아내들을 기리는 동상이다. 1974년에 지어졌다.

전쟁 과부와 아이들 동상

  • 가미카제 조종사들의 동상 - 유슈칸 왼편에 있는 동상으로,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 소속이었던 5 위해 지어졌다.

가미가제 조종사 동상

  • 오무라 마시기로 동상 - 1893년에 지어진 일본의 첫 서구식 동상으로, 현대 일본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오무라 마시지를 기리며 지어졌다.
  • 전쟁에서 죽은 말, 전서구, 개들을 기리는 동상 - 이 동상들은 모두 따로따로 세워졌다. 말을 기리는 동상은 1958년에 세워졌고, 1982년에는 군대에서 전서구로 쓰였던 비둘기들을 기리는 동상들이 세워졌으며, 마지막 개를 기리는 동상은 1992년 3월에 독일셰퍼드의 모습으로 지어졌다. 이들을 추모하는 뜻에서 종종 물이 든 물병들이 뚜껑이 열린 채 이 동상 앞에 놓이곤 한다.

재정수입

매년 예산은 20억 엔을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요 수입은 합사된 전사자 200여만 명 유족들의 향불 값과 야스쿠니 내 전쟁 기념관인 유슈칸(游就館) 입장료, 협찬금 등이다.

교통편

도쿄 메트로 난보쿠선, 유라쿠 초선, 주어 본선, 도영 지하철 신주쿠선 이치가야역 A4 출구, 또는 도쿄 메트로 도자이어선, 한조몬선, 도영 지하철 신주쿠선 구단 시타 역 1번 출구 사이에 있다.

국제 사회

대한민국

대한민국에서는 일본 신사에 대한 인식이 많이 없는 편이지만 특히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군 전범들을 합사하였던 곳이자 일본 극우세력의 성지로 알려져서 방송 뉴스에서도 많이 언급되었던 편이라 당연히 한국 국민들의 인식은 좋지 않은 편이다. 1985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그 당시 한국 지상파 뉴스와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었으며 2001년 8월 13일에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종전기념일을 2일 앞두고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한국 내에서 반일 감정이 악화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고 2006년 8월 15일에는 종전기념일 당일에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한국 내 반발을 불렀다.


2013년 12월에는 아베 신조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그 당시 박근혜 정부 초기였던 한국과 관계가 악화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법상으로는 여행 금지구역으로는 지정되지 않았으나 국민정서상으로 전범들을 합사한 신사라는 인식 때문에 한국인 대다수가 방문을 자제하고 있다.

중국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중일 전쟁과 난징 대학살의 역사로 인하여 대한민국 못지않게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편이다. 특히 난징 대학살 당시 가담했던 전범들이 모셔진 것으로 알려져서 반감이 큰 편이며 일본 총리들이 참배할 때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친화이강 가에 쌓인 대학살 희생자들의 시체 더미와 일본 군인의 모습. 당시 패잔병을 처리한다는 명목으로 항복한 중국군과 민간인 남성들을 대량 총살하였다.

대만

친일 국가로 알려진 대만도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은 역사가 있으며, 그 과정에서 웃어 사건, 타파니 사건 등의 과거가 있어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이 존재한다. 마잉주 전 대만 총통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상처에 소금을 껴안는 일"이라 비판한 바 있다.

홍콩

홍콩 또한 영국령 시절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홍콩을 침략하여 일본과 영국의 전쟁이 일어났고(일명 홍콩 전투), 일본에 식민 지배를 당한 피해국이기 때문에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홍콩 전투 종결 이후 승리 퍼레이드를 하는 일본군의 모습.

미국

동맹국이 일본이면서 중국을 매우 싫어하는 미국 또한 이 신사에 대해서는 중국의 손을 들어주며 일본을 비판하는 편이다. 태평양 전쟁의 A급 전쟁범죄자가 합사되어 있다는 점부터 미국이 볼 때도불편할 수밖에 없는 장소이다.

싱가포르

싱가포르 역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비판하였다. 참고로 싱가포르는 일본의 침략과 점령을 당한 역사가 있다.

베트남

2014년 1월 1일, 베트남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의 책임이 일본에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참고로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면서 중국의 절반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중국과 베트남 사이의 국경이 일본과 베트남 사이의 국경이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일본은 베트남을 시작으로 동남아시아를 침략하면서 베트남 또한 일본의 식민지가 됐었다.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 총리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비판하였다. 참고로 말레이시아 또한 일본의 침략과 식민 지배를 받은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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