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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t worry be happy

역대 항공 사고 원인 및 최악의 항공 사고

by 상상브로스 2024.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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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민간항공기구(ICAO)는 항공 사고(aviation accident)를 승무원이나 승객이 항공기에 탑승한 후부터 내릴 때까지의 사이에 그 항공기가 운항함으로써 일어난 사람의 사망, 부상, 항공기의 손상 등 항공기와 관련된 모든 사고를 의미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NASA에서 비행기 착륙 사고를 실험한 장면


사고라고는 할 수 없으나 항공기의 운항 안전에 큰 위협이 되었다거나 또는 그럴 가능성이 큰 사건들을 항공 사건(aviation incident, 준사고)이라고 한다.


ICAO에서 발표되는 사고의 통계 숫자는 정기항공 운송사업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나, 1945년~1972년간 30년이 못되는 기간에 여객운송 실적(여객수*비행거리)은 약 70배로 증가한 반면 항공사고로 인한 사망률(여객 kg당 사망자수)는 1/14로 감소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역사

항공기가 생겨나면서부터, 때론 심각한 결과를 낳는 항공 사고는 발생해 왔다.

이것은 비교적 약한 매체인 공기가 중요한 덩어리를 지탱하고 있는 지지대 역할을 하는데, 이 지지대가 무너지면 항공기는 성공적인 비행을 하기 위한 조건을 잃어버리게 된다. 때문에, 항공디자인을 할 때 실패할 확률을 최소로 할 수 있도록 고려되고, 조종사들은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도록 교육을 받는다.

처음으로 알려진  열기구  사고( 1785년  6월 15일 )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행기는 이동수단중에 가장 안전한 수단임에도 사고들은 계속 일어나고 있다. 항공사고는 비교적 드문 사고임에도 불구하고 종종 극적인 결과를 동반하기 때문에 항공사고가 발생하게 되면,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재앙(기상이변이나 다른 사고로)으로 죽을 확률보다, 비행기 사고를 당할 확률이 뚜렷히 낮다.


오토 릴리엔탈은 1896년 8월 9일에 그의 글라이더로 활공하던 도중 갑작스러운 돌풍으로 인해 조종불능상태에 빠져, 17미터 아래로 추락하였다. 그 결과 그는 척추골절의 중상을 입고 다음날 사망하였다. 마지막 순간 그는 "Small sacrifices must be made" "작은 희생들은 반드시 치러야 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또한 퍼시 피쳐라는 릴리엔탈과 같은 유망한 항공기 개발자가 있었는데, 그는 1899년 9월 20일에 호크에서 비행기를 시험하는중에 사고로 사망하였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후 많은 혁신적인 디자인과 동력 비행기에 대한 아이디어들이 남겨져 비행기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라이트형제   비행기  최초 사망사고, 동승한  토마스 셀프리지  중위가 사망하였으나,  미국 육군 은 1년뒤에 이  비행기 를 샀다.


라이트 형제도 1903년 12월 그들 나름의 비행기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무수한 시험 비행을 하면서 실패를 겪었다. 또한 1908년 형은 비행기 1호를 가지고 프랑스에 가서 거기에서 데먼스트레이션 비행(시위 비행)을 연속적으로 실시하고 다시 이 비행기를 상품화하기 위해 회사까지도 설립했다. 한편으로 미국에 잔류하고 있던 동생도 똑같이 일반 공개를 시작했으나, 1908년 8월 17일 그가 타고 있던 비행기가 추락하고 말았으며 이 사고로 승객 1명이 사망하고 동생은 한쪽 다리와 늑골 2개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곧 미국 정부는 국방부를 통해 비행기 구입을 위한 계약에 서명했다.

 

최악의 항공 사고

테네리페 공항 참사

 

테네리페 공항 참사(영어: Tenerife Airport Disaster)는 1977년 3월 27일 17시 6분(현지 시각) 스페인 카나리아 제도 테네리페섬의 노르테 공항에서 택싱 중이던 팬아메리칸 항공의 1736편과 이륙 중이던 KLM의 4805편 보잉 747 항공기 2대가 활주로 상에서 충돌, 583명이 사망한 참사로, 세계 역사상 최악의 항공참사로 기록되었다. 또한 대부분의 항공 사고가 자연재해나 인재 등 단일 원인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과는 달리, 이 사고는 모든 상황이 복합적으로 맞물려 일어났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KLM  항공기의 파편

테러에 의한 공항 폐쇄

클리퍼 빅터(Clipper Victor)로 명명된 팬암 1736편은 보잉사에서 1969년 제작한 747-121로써 등록기호는 N736PA였다. 이 항공기는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을 이륙하여 뉴욕의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을 경유한 상태였다. 한편 라인(Rhine)으로 명명된 KLM 4805편은 보잉사에서 1971년 제작한 747-206B였으며, 등록기호는 PH-BUF였다. 이 항공기는 사고 4시간 전, 암스테르담의 스키폴 국제공항을 이륙한 상태였다. 이들 항공기들의 최종 목적지는 당시 대서양의 리조트로 각광받던 그란 카나리아 섬의 라스 팔마스 공항이었다.


최종 목적지에 다가가던 도중, 팬암기과 KLM기는 라스 팔마스 공항이 카나리아 제도 분리독립파 조직의 폭탄테러 예고전화로 임시폐쇄되었다는 소식을 통고받았다. 팬암기는 공항폐쇄가 길지는 않을 것이라는 정보를 얻고, 연료도 충분히 남아있었기에 착륙허가가 떨어질 때까지 라스팔마스 공항 상공에서 선회대기할 것을 요청했으나, 이윽고 다른 여객기와 마찬가지로 테네리페 섬의 로스 로데오 공항에 다이버트(divert;임시착륙)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KLM기 또한 로스 로데오 공항으로 회항 지시를 받게 된다.


1개의 활주로와 1개의 평행유도로, 여러 개의 유도로를 가지고 있던 지방공항인 로스 로데오 공항은 KLM기가 착륙한 시점에서 주 에이프런(주기장)의 평행유도로상에까지 다른 비행기가 주기하고 있는 상태여서 관제탑은 평행유도로단부의 이륙대기장소에 주기를 명령했다. 약 30분 후에 착륙한 팬암기도 이 이륙대기장소의 KLM기 뒤로 다른 3대와 더불어 주기했다. 평행유도로가 꽉찼기 때문에 이륙하는 비행기는 활주로를 이동하여 이륙위치에까지 역주하여 이동할 필요가 생겼다.

 

충돌에 이르는 과정

연료 보급

팬암기 착륙 약 2시간 후, 라스 팔마스 공항에 대한 폭탄테러 예고전화가 허위로 판명되면서 각 항공기에 공항폐쇄는 해제되었다는 사실을 통보하였다. 승객을 기내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대기하던 팬암기는 이륙위치로 이동할 준비가 되었으나 이동할 수 없었는데, 승객을 기내 밖으로 내려놓았던 KLM기의 기장 야코프 벨드하위전 반 잔텐(Jacob Veldhuyzen van Zanten)이 승객의 재소집에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이라 생각해 급유를 결정하였고, 라스팔마스 공항 재개 소식 5분 전부터 연료보급차가 급유를 시작하면서 KLM기가 이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고의 전체상 로스 로데오 공항의 주 활주로의 양쪽에서 팬암기(파란색)와 KLM기(하늘색)이 접근해 충돌했다(빨간 별모양). 짙은 안개때문에 관제탑(동색)은 2대의 상황을 확인할 수 없었다.


눈앞에서 KLM기의 연료보급을 본 팬암기는 무선으로 직접 KLM기에게 급유 예상 소요시간을 물어보았고, 정확하지는 않지만 [35분 정도]라는 회답을 받았다. 타 비행기들은 보잉 747보다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KLM기 옆을 지나서 이륙할 수 있었지만, 팬암기는 기장 빅터 그러브스(Victor Grubbs)의 요청 아래 부조종사와 기관사 2명이 밖에서 날개 간 거리를 실측한 결과 아슬아슬하여 KLM기를 비켜갈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지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급유가 끝나면서 KLM기가 먼저 엔진을 시동하여 택싱을 개시하였고, 몇 분 후 팬암기도 그 뒤를 따랐다.

유도로 와 기상상황

활주로를 역주하여 끝까지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은 KLM기와, KLM기를 쫓아 같은 활주로를 이동하다 C3유도로로 활주로를 빠져나와 평행유도로에서 대기하라는 지시를 받은 팬암기는 관제탑의 지시 아래 이동하고 있었는데, 도중 안개가 끼면서 1000피트로 시야가 좁아져 관제탑에서 활주로의 상황을 주시할 수 없게 되었다.


KLM기는 활주로를 역주하여 끝까지 이동, 그 자리에서 180도 회전 후 항공교통관제관(ATC)에게서 관제승인(ATC 클리어런스)을 기다렸다. 팬암기 또한 C3 출구에 도착하였는데, 이 출구를 나오기 위해서는 왼쪽으로 135도 회전을 해야했었고, 좁은 활주로에서 보잉 747기가 이러한 급회전을 하는 것이 불가능 하다고 생각해 45도 회전만 하면 되는 C4 출구로 향하면서 활주로를 계속 나아가게 되었다 (테네리페 ATC는 짙은 안개로 이를 인지하지 못했다).

테네리페 참사 추모비

의사소통의 문제

테네리페 관제탑은 KLM기에게 관제승인을 내렸다. 관제승인은 아직 이륙의 스탠바이라는 뜻이기에 이륙을 시작하라는 승인은 아니었지만, KLM기는 이것을 이륙허가로 받아들였다. 판 잔턴 기장은 브레이크를 해제하고 부조종사는 네덜란드식 영어로 "We are at take off"(이륙위치에 있습니다)라고 한 후 곧 "We are taking off"(이륙하겠습니다) 라고 회답을 했다. 관제탑은 듣지못한 메시지에 혼란스러워하며, KLM기에게 그 장소에 대기하라고 답했다. [O.K..(약 2초간 무응답)이륙을 준비하라. 우리가 부를 때까지 대기하라(OK,....Stand by for take off. I will call you)라고 했으나, 여기서 이어진 2초간의 무응답상태가 후에 문제가 되었다.


팬암기는 이 양쪽이 보내는 통신내용을 듣고 즉시 불안감을 느끼고, [안돼! 우리는 아직 활주로 위를 택싱중이다.(No, we are still taxiing down the runway)]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 팬암의 무선송신은 위 기록의 2초간의 무응답상태의 직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KLM기에서는 [OK!]라는 한마디만을 들었고, 그 후는 혼신을 나타내는 스킬음으로써 기록되지 않았다. 2초간의 무응답상태로 인해 ATC의 송신은 끝난것으로 판단한 팬암기는 송신을 시도했으나, ATC는 아직 송신버튼을 누르고 있었기에 혼신이 생겼다. 거기에 ATC와 팬암기 양쪽은 이 혼신이 생긴 것을 느끼지 못했다. 이로 인해 팬암기는 [경고가 KLM기와 ATC 양쪽에 알려졌다], ATC는 [KLM기는 이륙위치에서 대기중이다], KLM기는 [OK] 이 한마디를 [이륙허가가 나왔다]라고 각자 확신해, 실제로 KLM기는 스로틀을 전개하여 이륙활주를 개시했다.


안개때문에 KLM기는 팬암기의 보잉747기가 아직 활주로상에서 자신들의 방향으로 이동중인 것을 보지 못했다. 더해서 관제탑에서는 어느 항공기도 보이지 않았고, 더욱 나쁜일은 이 활주로에는 지상관제 레이다는 설치되었지만 작동하고 있지 않았었다는 점이다.


다만 충돌을 피할 수 있었던 기회가 딱 1번 있었다. 위 기록된 교신이 끝난 3초후에 다시 ATC는 팬암기에게 [활주로를 비웠는지 보고하라(Report the runway clear)]라고 부르자, 팬암기도 [OK, 우리가 활주로를 비우면 보고하겠다.(OK, we'll report when we're clear)]라고 회답했다. 이 수신내용은 KLM기에서도 똑똑하게 들었다. 이것을 들었던 KLM기의 기관사는 팬암기가 활주로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사고후에 회수된 KLM기의 CVR(콕핏보이스레코더)에서는 다음의 대화가 녹음되어 남아있었다.


KLM기관사: 팬암기가 아직 활주로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KLM기장: 뭐라고?
KLM기관사: 팬암기가 아직 활주로 위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냐고요?
KLM기장: (강한 어조로) 아니, (활주로에) 없어!
무엇보다 반 잔텐은 상사일 뿐만 아니라, KLM에서 가장 경험이 풍부한 파일럿 중에 한 명이었기 때문에 기관사는 무겁게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충돌

KLM기에게 경고를 주었다고 생각한 팬암기 조종실에서는 기장이 [Let's get the hell right out of here. (빨리 여기서 탈출(이륙)하자.)], 기관사는 [Yeah ... he's anxious, isn't he? (그러게요.... (KLM 항공기가) 걱정이 많은가보네, 그렇지 않나요?)], [After he's held us up for all this time - now he's in a rush. (그가 (KLM 항공기) 우리를 못가게 막아두었는데... 이제는 급한가 보네요.)]란 대화를 나누면서 활주로의 C4출구에 들어가려던 그 순간 기장이 KLM기의 착륙등이 접근하는 것을 확인했다.

최후의 순간  팬암기(파란색)는 전방 왼쪽의 4번출구로 회피하려 했다. 팬암기를 확인한 KLM기는 속도를 높이고 있었기 때문에 가속하여 이륙을 빨리하는 대처 방법밖에는 없었다. 충돌은 팬암기 위로 KLM기가 덮치는 형태로 일어났다.


기장은 KLM기를 발견하고는 [저기있네! 저거봐! 미친.... 저 개자식이 우리한테 돌진하고 있어!((There he is! Look at him! Goddamn ... that son-of-a-bitch is coming straight at us!)]라고 말하는 동시에 [Get off! Get off! Get off! (나가요! 나가요! 나가요!)]라고 말하는 부조종사의 목소리도 기록되었다. 충돌 10초전 팬암기의 조종사들은 출력을 전개하여 C4출구를 향해 급속히 좌측으로 턴을 시도하려 했으나, 아무래도 시간이 없었기에 기수를 45도 정도로 돌린 것이 전부였다.


한편 KLM기는 이 속도가 바로 [V1(이륙 결심 속도)]을 초과한 것이기에 정지제동은 할 수 없었고, 또한 [VR(기수를 올릴 수 있는 속도)]에는 도달할 수 없는 상태였기에 충돌을 피하기 위해 강인하게 기수를 올리는 조작을 취했으나, 동체를 활주로에서 20m정도 띄우는 것에 불과했다. 겨우 띄웠던 KLM기의 동체하부는 활주로상에서 좌측으로 회전중이던 팬암기의 기체상부에 엎어지는 형태로 충돌해 조종석 바로 뒤인 팬암기의 퍼스트클래스 라운지부분을 분쇄하고, 충돌지점에서 150m 미끄러진 후 기체가 추락해 활주로를 활활 불태웠다. 동체상부를 완전히 파괴당한 팬암기는 그 장소에서 떨어져 대폭발을 일으켰다. 모든기의 승객 614명의 가운데 대부분 승객들이 동체의 변형이 너무 심각해 탈출할 수도 없어 사망했고, 구조한 사람들 중 팬암 승객들과 팬암 승무원들 70명 가운데 팬암 승객과 승무원 9명이 병원에서 치료중 사망하였고, 팬암 승객들과 팬암 승무원의 부상자이자 생존자들은 61명뿐이었다. 원인은 충돌시에 흘려진 연료에 의한 폭발과 화재였다.

조사 및 원인

스페인, 네덜란드, 미국에서 파견된 70명 이상의 항공 사고 조사관, 양쪽 항공기의 운영사인 팬 아메리칸 항공과 KLM이 사고조사에 들어갔다. 사고가 KLM기에게 책임이 있다는 스페인 측 조사결과와 복잡한 원인에 의해 벌어진 것이라는 네덜란드 측 조사결과가 대립하였으나, 후에 네덜란드 측이 공평한 조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전체적인 원인

사고 당시 파일럿과 관제탑 사이의 오해 및 잘못된 가정. CVR을 듣고 벌어진 조사에서 테네리페 관제탑이 KLM기는 활주로 끝에 정지하여 이륙허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이때 KLM기 파일럿은 이륙허가가 나왔다고 확신한 것을 알았다.

부분적인 원인

각각의 원인이 상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지금도 의론이 있으나, 총합한 결론은 전체적인 원인 아래 아래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발생해 사고가 일어났을 것이라 생각한다.


팬암기 기장이 아직 활주로에 있다는 보고가 있을 당시, KLM기 기장이 이륙을 중단하지 않은 사실.
팬암기가 이미 활주로를 이동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KLM항공기관사의 질문에 KLM기장이 아직 이동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거부한 일
눌러야만 되는 무선음성.
KLM부조종사 및 관제관이 표준이 아닌 용어("We're at take off"와 "O.K")를 교신으로 사용한 것.
팬암기가 지시받은 C3출구를 통해 활주로를 나가지 않은 일.

대책

항공규칙 개정

사고 이후, 비행기 및 국제항공규칙에 대한 전면적인 변경이 이루어졌으며, 국제 항공에 관련된 조직은 표준화된 용어를 사용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CRM의 도입

사고 이후 항공업계에 CRM(Crew Resources Management, 인적자원관리) 개념이 도입되었다. 이것은 그룹 멤버 간의 엄격한 상하관계가 그룹 간의 의사소통 및 정보교환을 방해하는 것을 보완, 상관이 부하에게 명령을 내릴 때도 상호간의 합의에 의한 의사결정을 강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CRM은 항공회사의 기초적인 안전관리방식과 훈련체계로 인정받고 있다.

신공항의 건설

테네리페 섬의 북부인 로스 로데오와 그 주변 지역에 짙은 안개가 잦게 발생하고 이것이 사고로 이어지자, 섬 남부에 새로운 공항을 건설하게 되었다. 새 공항인 레이나 소피아 공항이 완공되면서 로스 로데오 공항의 국제선 업무가 이관되었고, 로스 로데오 공항은 카나리아 제도 내의 섬과 스페인 본토로의 비행에 사용되고 있다.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日本航空123便墜落事故)는 1985년 8월 12일 일본 도쿄 하네다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오사카 이타미 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던 일본항공(기종 보잉 747SR-100, 등록번호 JA8119기)이 군마현의 다카마가하라산에 추락한 사고다.

1984년   하네다 국제공항 서 촬영된 사고기


단일 항공사고로는 사상 최대의 사망자를 낸 사고이다. 일본 운수성(현 국토교통성으로 대한민국 국토교통부 격임) 항공사고조사위원회의 사고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사망자 수는 승무원과 승객을 합쳐 520명에 달하며 단일 항공기 사고로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항공 사고이며 항공기 탑승객 총 사망 순위로는 세계 2위, 아시아 1위의 참사이다.

사고 경위

당시 123편은 18시 정각에 도쿄 하네다 국제공항을 이륙, 남서쪽을 향한 후 이즈오지마에서 서쪽으로 순항, 구시모토 상공에서 북서쪽으로 비행하여, 18시 56분에 오사카 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사고 기체는 보잉 747인 등록번호 JA8119이었다.

18시 4분, 524명을 태운 123편은 원래 출발 시간보다 약간 늦게[2] 하네다 공항 18번 탑승구를 떠나 18시 12분에 16번 활주로에서 이륙했다.


18시 24분(이륙으로부터 12분후), 사가미만 상공에서 순항 고도 24000피트(7200 m)를 향해 상승하던 중, 23900 ft를 통과하는 순간 갑작스런 폭발음[3]과 함께 123편의 꼬리날개는 수직 안정판의 하단부만을 남기고 파괴되어 유압계의 총 4계통 모두가 완전히 손실되었다. 유압을 사용하는 엘리베이터(승강타)나 에일러론(보조 날개)의 조종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휴고이드 운동과 더치 롤을 일으키며, 기체는 17분간 20000ft(6000m) 이상으로 비행을 계속한다.


18시 40분 무렵, 하강을 위해 항력장치인 랜딩 기어를 내린 후(비상절차로 작동 시킴), 후지산 동쪽 기슭으로 북상하나, 야마나시현 오츠키시 상공에서 급작스레 오른쪽으로 선회하며 고도 22000피트에서 6000피트로 단번에 15400ft(4600m)를 하강한다. 그 후, 기체는 도쿄 하네다 국제공항을 향하는 항로가 지나가는 사이타마현 상공에서 왼쪽으로 선회, 군마현 남서부의 산악 지대로 향하기 시작한다.


조종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23편은 계속 하강하여 18시 56분 14초에 대지 접근 경보 장치(GPWS)가 작동했다.이때의 위치는 도쿄 북서쪽 65km 산악지대이다.

123편 경로


17초 무렵, 기체는 조금 상승했다. 18시 56분 23초, 기체 후부와 오른쪽 주 날개가 수목과 접촉했다. 이때 기수를 올리기 위해 엔진 출력을 올린 것과 함께 기체가 급강하하면서 속도는 346kt(640km/h)에 도달했다. 이후 기체는 일단 상승했지만, 오른쪽으로 크게 기울어졌다.


26초, 오른쪽 주 날개가 지면과 충돌하고 동시에 기체의 파괴가 시작되었다(수직·수평꼬리, 오른쪽 주 날개의 이탈). 28초에는 기체 후부가 분리. 기체는 기수를 내리면서 우측으로 회전했다. 18시 56분 30초, 123편은 타카마가하라산의 경사면에 반전하는 형태로 추락, 충돌했다.


18시 56분 28초까지 녹음됐던 음성 기록장치에는 23초와 26초 무렵에 충격음이 남아 있다. 23초의 충격음 직전에는, 기장이 「이젠 끝이야!(もうだめだ!)」라는 절박한 고함소리도 녹음되어 있다.


충격에 의해 기체 앞부분부터 주 날개 부근의 객실은 원형을 알 수 없을 만큼 파괴되었다(후의 조사에 의하면 기체의 대부분은 수백 G의 충격이 더해졌다고 한다). 두 날개도 파괴됐다. 한편, 28초 때 분리된 객실 후부와 뒷날개는 산의 능선을 넘어 경사면을 스치고 지나갔다. 객실 후부는 능선과의 충돌을 면하고, 경사면에 평행에 가까운 각도로 착지해 수목을 쓰러뜨리면서 능선의 경사면과 접촉하여 천천히 감속했다. 이 때문에 다른 부위에 비해 충격을 덜 받았다. 또, 화재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 사고로 탑승객 520명은 사망하였다. 그러나 그 외의 사람은 즉사 혹은 거기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그리고 중상을 입은 생존자 중 상당수가 이튿날 아침에 수색대가 도착하기 전 사망했다(생존자들의 말에 따르면 10여명 정도는 추락직후에 생존해 있었다고 한다).

원인

추락한 항공기는 사고 7년 전 1978년 6월 2일 오사카 이타미 국제공항에 착륙 중 테일스트라이크(일본항공 115편 불시착 사고)로 인하여 후미에 손상을 입어 제작사인 보잉에 정비를 요청한 적이 있었다. 벌크 헤드는 비행기의 기압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데(알루미늄캔의 바닥을 생각하면 된다). 당시 격벽이 손상을 입었기 때문에 일본항공에서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당시 보잉의 기술자는 이를 수리할 때 2줄의 리벳이 박힌 이중 철판으로 동체와 고정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지만 이 규정을 무시하고 1줄의 리벳이 박힌 이중 철판만으로 고정을 했다. 그 결과 계속된 비행으로 압력이 변할 때 금속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터져 나가 버리는 바람에 수직 꼬리 날개를 날리면서 방향 타면을 움직이는 동력을 제공하는 유압의 분배기인 토크 박스를 터트려 서서히 유압이 새어 나가면서 조종 능력을 상실한 비행기는 추락하고 만다.


또한 테일스트라이크로 인한 동체의 변형이 수리 후에도 그대로 남아 있어 사고 직전까지 캐빈 뒤쪽의 화장실 문이 잘 닫히지 않는다던지, 바람이 새어 들어오든지 휘파람 소리가 난다던지 등의 결함이 있었다.


이후 테일스트라이크 부분의 정비 부실로 2002년 중화항공에서 여객기가 공중분해된 사건이 일어난다.

항공사고의 주요 원인

항공사고의 거의 80%는 착륙과 이륙의 직전, 직후 혹은 도중에 일어난다. 1950년대부터 2006년에 이른 1,843건의 항공 사고는 다음의 원인에 인하여 일어났다.


53% : 조종사의 과실
21% : 기계적인 결함
11% : 악천후
8% : 다른 인간적인 실수(항공관제 실수, 항공기의 과적, 잘못된 정비, 연료의 오염, 의사소통의 문제 등)
6% : 고의적인 사고(하이재킹, 폭발물 사고, 격추 등)
1% : 기타 이유

 

트랜톨로&트랜톨로 항공사고의 흔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 조종사 과실
2. 악천후
3. 엔진결함
4. 소홀한 정비
5. 비행기 계기판의 오류
6. 아이싱(기체 표면에 얼음이 끼는 현상)
7. 항공 관제탑의 항공기 유도 실수
8. 화물 비행기의 과적
9. 기내의 결함있는 장비
10. 연료탱크 폭발


주요 항공 사고

대한항공 015편 착륙 사고

1980년 김포국제공항에서 발생한 항공 사고로, 로스앤젤레스발 앵커리지 경유 서울행 항공편으로, 보잉 747-200B가 김포국제 공항으로 운행 중이었다. 이날 김포국제공항은 짙은 안개에 싸여, 시야가 800~1000m정도에 불과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착륙진입을 시도하는중, 파일럿이 고도를 너무 빨리 내렸기 때문에 활주로의 앞의 제방에 엔진을 부딪혀 밸런스를 잃은 채 동체 착륙한 것 같은 상태로 2km나 활주로를 활주 한 후에 정지하였다. 승무원들과 승객은 긴급 탈출에 성공했으나, 기체는 완전히 소실되었다. 사고 원인은 안개에 의한 시야 불량으로 인해 진입이 언더 슛이된 파일럿 미스로 여겨지고 있다.

기계적 고장 때문에 전륜이 옆쪽으로 굳어져 비상 착륙을 하는  에어버스 A320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1997년 8월 6일 김포국제공항에서 출발하여 괌에 있는 앤토니오 B. 원 팻 국제공항에서 착륙에 실패하여 추락, 승객 231명 중 208명, 승무원 23명 중 20명이 사망하여 총 228명이 사망한 사고이다.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하여, 1987년 11월 29일 인도양에서 공중 폭파된 사건이다. 북한 공작원들의 소행으로 밝혀졌으며, 대한민국의 1988 올림픽에 대한 북한의 열등감과 시기질투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다. 이사고로 승무원20명, 승객 95명 총115명이 전원 사망하였다.

부품탈락에 의해 연료탱크가 파손해 기체 화재를 일으킨  보잉737-800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OZ733, AAR733, 등록번호 HL7229 편의 아시아나 항공 733편이 1993년 7월 26일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추락하여, 66명의 사망자를 낸 사고이다.

제주항공 502편 활주로 이탈 사고

2007년 8월 12일 부산의 김해국제공항에서 착륙후 주기장으로 이동하던 제주항공의 봄바디어 Dash8 Q400항공기가 강풍으로 인해 구활주로 G6와 G7사이의 지점에서 좌측 배수구로 항공기가 빠지는 사고가 발생하여, 승객 74명중 10여명이 부상당한 사고이다.

중국국제항공 129편 추락 사고

2002년 4월 15일 경상남도 김해에서 발생한 민항기 추락사고이다. 당시 김해공상에 서클링 접근으로 착륙이 허가되었으며, 서클링 접근으로 중국국제항공소속 보잉 767-200ER항공기가 김해공항 18R 활주로에 착륙을 시도하던 중 선회지점을 지나쳐 인근 돗대산에 추락하였다. 승객 167명중 128명이 사망한 참사이다. 대한민국 항공,철도사고 조사위원회의 조사결과 이 사고의 원인은 운항 승무원의 총체적인 안전사항 미비로 인한 추락사로 결론을 내렸다.

위버링겐 상공 공중 충돌

2002년 7월 1일에 발생한 DHL 661편 화물기와 바시키르 항공 2937편이 독일 남부 위버링겐 상공에서 충돌한 사고이다. 71명이 사망한 사고로, 조종사 실수, ATC의 미흡한 대처로 인한 사고이다.

에어프랑스 447편 추락 사고

2009년 7월 1일에 발생한 에어프랑스447편 여객기(기종-에어버스 A330-200)이 리우데자네이루공항에서 프랑스 샤를 드 골 국제공항으로 가던 중 조종실수로 인한 실속으로 추락한 사고이다. 탑승승객 및 승무원 228명 전원 사망하였다.

2001년 일본항공 스루가 만 상공 니어미스 사고

2001년 1월 31일에 발생한 관제사의 실수 및 ATC의 오작동으로 인한 니어미스사고로, 일본항공8546편 맥도넬더글러스 DC-10항공기와 보잉 B747-400D 여객기와 충돌할 뻔 한 사고로, 사망자는 없었다.

트랜스월드 항공 800편 추락 사고

1996년 7월 17일에 발생한 트랜스월드항공 800편(기종 보잉 747-131)이 기종의 노후화 및 합선으로 인해 폭발하여 추락한 사고이다.

2024년 바르자칸 헬리콥터 추락 사고

2024년 5월 19일 이란의 바르자간에서 타브리즈로 향하던 중 헬리콥터가 추락한 사고이다.

사고 통계

제네바에 위치하고 있는 항공기 사고 기록 기구(ACRO)는 헬리콥터, 열기구, 전투기가 아닌, 6명이상의 탑승객을 운반하는 항공기의 항공사고의 통계를 제공했다. 항공기 사고 기록 기구(ACRO)에 따르면 2007년이

연도 - 사망자수 - 사고횟수
2008 - 876 - 147
2007 - 965 - 136
2006 - 1,293 - 164
2005 - 1,454 - 184
2004 - 766 - 165
2003 - 1,244 - 198
2002 - 1,399 - 173
2001 - 1,535 - 187
2000 - 1,567 - 179
1999 - 1,130 - 198
1972 - 3,214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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